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이두정치와 홋슈지도노 진영 === 인세이파와 친정파 양측의 유력한 신하가 다같이 제거된 상태에서 >"'인(院)과 다이(內)가 마음을 합쳐"'(《구간쇼》) 행하는 이두정치가 확립되었다. 구란도노카미(蔵人頭, 장인두)를 지낸 나카야마 타다치카(中山忠親)의 《잔카이기》(山槐記)에 의하면, 당시 주요 국정 안건은 고시라카와인과 [[니죠 덴노]]에게 주상되어 전 칸파쿠(關白)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가 자문에 대답하는 형태로 처리되고 있었다. 10월이 되어 고시라카와인은 소실된 산조도노를 대신할 새로운 인세이의 거점으로서 홋슈지도노(法住寺殿)의 축조에 착수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저택이 있는 로쿠하라(六波羅) 남쪽의 히가시시치조(東七條)의 끄트머리에는 셋칸 정치기에 후지와라노 다메미쓰(藤原為光)가 지은 홋슈지가 있었지만 일찍 쇠락해버리고, 신제이의 저택(헤이지의 난으로 소실)과 후지와라노 기요타카(藤原清隆), 기이노 니이(紀伊二位)의 불당 등이 늘어서 있었다. 홋슈지도노 축조는 하리마노카미(播磨守)를 중임하게 된 후지와라노 이에아키라(藤原家明)가 맡아서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의 옛 저택을 이축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는데, 10여 정의 토지 안의 크고 작은 건물 80여 채를 부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잔카이기》 에이랴쿠 2년 4월 13일조). 10월 16일에 고시라카와인은 홋슈지도노의 지신으로 히요시샤(日吉社), 구마노샤(熊野社)를 권청했는데, 새로 권청된 히요시샤는 경마나 야부사메 같은 무사의 무예가 개최되는 장소가 되었고, 구마노샤는 구마노 참배를 떠나기 전에 일정 기간 머물며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는데, 고시라카와인은 17일에 권청한 지 얼마 안 된 구마노샤에 머물며 기도하고, 23일에 첫 구마노 참배에 나섰다. 여기에는 [[타이라노 키요모리]]도 동행했다. 이후 인의 구마노 참배는 무려 34회에 달했다[* 이 가운데 실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28회이다.]. 구마노에 참배하러 간 사이, 비후쿠몬인이 11월 23일에 훙서했는데(《잔카이기》) 즉위한 이래로 줄곧 비후쿠몬인파와의 협조에 신경써야 했던 고시라카와인으로서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니죠 덴노를 억누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일도 꿈은 아니게 되었다[* 홋슈지도노 축조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듬해 4월 13일에 완성한 고세로 옮겨 살았다.]. 반대로 친정파에게 있어 후원자였던 비후쿠몬인을 잃은 것은 큰 타격이었다. 한편 고시라카와인이 정무를 맡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를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인의 측근으로 예능에 통달한 자는 많았지만, 도바 인세이 이래의 전통적인 귀족이나 실무 관료와의 연계는 옅었고, 그 지지 기반도 강고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시라카와인의 총애는 오로지 조사이몬인[*上西門院 무네코 내친왕, 統子内親王, 1126~1189, 도바 덴노의 제2황녀 ]의 여방(女房) · 쇼벤노 쓰보네(小弁局) 타이라노 시게코(平滋子)에게 쏠려 있었고, 황후나 다른 후궁들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여어(女御) 무네코(琮子)의 아버지 산조 기미노리(三条公教)나 황후의 아버지인 도쿠다이지 기미요시(德大寺公能)도 연달아 사망하는 등 고시라카와인과 '''후지와라 칸닌류'''(閑院流) 사이의 관계는 소원해져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